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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 이용문장군

영혼샘 2008. 5. 1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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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표 제 목 이용문 소장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2004/07/31
요 약 정 보

● 본관 : 안악(安岳)
● 호 : 만취(晩翠)
● 성명 : 이용문(李龍文)
● 생몰연대 : 1916.1.22-1953.6.24
● 출신지역 : 평남 평양
● 최종계급 : 육군 소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상 세 설 명

※약력

*1916 1 평남 평양 출생
*1948. 11 육군사관학교 입교 및 육군소령 임관
*1948. 11 육군 기갑단장
*1949. 7 육군본부 정보국장
*1949. 10 옹진지구전투사령관
*1949. 10 육군참모학교 부교장
*1951. 6 육본 작전교육국장
*1951. 8 육군준장
*1952. 3 제 9사단 부사단장
*1952. 7 수도사단장
*1952. 10 남부지구경비사령부사령관
*1953. 6 전사
*1953. 6 육군소장(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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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916년 1월 22일 평안남도 평양시 대신동에서 출생한 이용문(李龍文) 장군은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온 후, 1948년 11월 제7기 특임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2290의 군번을 부여받고 육군 소령으로 임관한 그는 한 달 후에는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여 초대 기갑단장이 되었다. 1949년 4월 육군 대령으로 진급한 뒤, 같은 해 7월에는 백선엽(白善燁) 장군에 이어 제2대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9년 10월 그는 북한군과 국군 사이에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던 옹진지구전투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부임하였으나, 곧바로 비교적 한직으로 인식되던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으로 전보되어 재직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참전하게 되었다.
이후 1951년 3월 무렵 제9사단 부사단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쟁이 교착상태로 접어들었던 1952년 7월에 수도사단장으로 보임되어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전투를 수행하였다. 이어 남부지구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전보된 그는 지리산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여 작전을 독려하던 중 1953년 6월 24일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지역에서 항공사고로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 이용문 육군준장을 육군소장으로 추서하고, 1953년 7월 17일에는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함으로써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전심전력으로 국난을 극복하는데 앞장섰던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현재 그의 유해는 수유리 선영에 안장되어 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당시 국방장관의 병력차출 지시를 정치적 이유라고 거부하기도 했던 장군은 1952년 7월 11일 수도사단장으로 발령을 받고 작전교육국장직을 떠나는 이임식에서 “군인은 정치에 개입해선 안된다. 정치에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정치를 알아야 한다”고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였다.
활달하고 영웅적인 기상과 넓은 포용력을 겸비했던 장군은 정의감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슴 가득 간직한 호남아였다. 가까이서 그를 대했던 유양수 장군은 “파격적이고 기발한 발상을 할 수 있는 분이었죠. 그러면서 사물을 넓게 보고 먼 데까지 내다 볼 수 있는 특출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우리 군의 선배로서 오래 살아 계셨다면 그 뒤의 일이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군대의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이때 이 장군이 살아 계셨다면 하고 아쉬워한 사람이 많았습니다”라고 이 장군을 회고하였으며, 또한 백행걸 장군도 “매사에 적극적이고 낙천적이며, 돈에는 무관심할 만큼 청렴결백하시고, 그러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에는 그렇게 치밀할 수가 없어요”라고 장군의 성품과 면모를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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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적

금성천 북쪽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확보하고 있던 수도사단은 1952년 7월 20일부터 10월 10일에 이르는 기간동안 중공군 제12군 예하의 제34사단과 제35사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다섯 차례의 공방전 끝에 진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쌍방은 수 천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 전투에서 사단장 이용문 준장은 탁월한 통솔력과 과감한 전투정신을 발휘하여 적을 격퇴하고 피탈되었던 고지를 탈환한 공로가 인정되어 1953년 7월 17일 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17호)을 사후(死後)에 추서받았다.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으로 있던 이용문 대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연락 겸 독전요원으로 서울방어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6월 28일 밤 제3사단 참모장 김종갑 대령과 함께 성북경찰서에서 약 500명의 장병을 지휘하여 적과 맞서던 중 북한군 전차부대의 공격을 받고 부대는 분산되었다.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는 데 실패한 그는 게릴라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일부 부하들을 이끌고 남산으로 들어갔으나, 식량과 장비 등 모든 여건이 적합하지 않자 부하들을 해산하고 시내로 잠입하였다. 적이 점령했던 3개월의 기간을 서울에서 은닉하는 동안 그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고, 그런 이유로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후에는 군 수사기관에 의해 조사까지 받게 되었다.
제9사단 부사단장으로 발령을 받은 1951년 3월 경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제9사단에 연대 단위로 군단 후방지역으로 북상하고 있는 북한군 패잔병의 소탕임무를 하달함으로써 이용문 준장은 이성가 사단장을 보좌하여 송계리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두타산을 경유하여 청옥산 부근으로 적이 이동하자 사단은 제28연대를 송계리에 투입, 제29연대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격퇴하고 잔적을 추격하던 중 임무를 제3군단에 인계하였다.
1951년 4월 25일 제3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되어 인제, 현리간의 도로를 포함한 한석산 서측지역을 담당하던 제9사단은 5월 7일부터 10일에 걸쳐 매봉산과 한석산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격으로 인해 현리전투가 시작되었고, 아군은 전투지경선이 노출되어 불가피하게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용문 부사단장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제9사단과 제3사단을 통합하여 선두에서 지휘하였다. 또한 그는 이 전투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당시 제9사단 30연대 부연대장이었던 이근양 중령은 “중공군에 포위되어 사령부와 통신이 두절되자 항상 휴대하고 다니던 야전전화기를 숲 속으로 가져가 찾아낸 전화선에 전화기를 연결, 직접 사령부와 통화를 하였다”고 경험담을 말하였다.
이처럼 이용문 장군의 실전에 기초한 질서 있는 철수지휘는 제9사단이 반격을 가하는데 일조할 수 있었다. 현리전투에 참여한 뒤 6월에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육본 작전교육국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1952년 7월 11일 수도사단장으로 보임된 그는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방어전에 임하였다.
포로송환 문제로 휴전회담이 개최된 지 1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적은 회담을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하기 위해 아군에 대한 강력한 국지공격을 감행해왔다.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 수도사단, 제3사단을 배속받아 1951년 적의 추계공세 때 제한공세작전에서 국군이 확보한 금성-북한강 동안까지의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군단의 방어중점은 금성의 통제를 최우선으로 주저항선의 주요 고지군을 확보하여 북한강으로 이르는 岵?접근로를 봉쇄하고 주저항선 전방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 현 전선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었다. 적은 중공군 제12군 예하 제31사단이 국군 제6사단 전방에 그리고 제35사단이 수도사단 전방에, 제68군 제203사단이 국군 제3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치국면 중에 제2군단장 백선엽 중장이 1952년 6월 10일 각 사단에 적정탐지와 적진파괴 및 교란을 목적으로 한 제한목표공격인 ‘백쇼트 작전’을 지시함으로써 전초진지쟁탈전이 전개되었으며, 이 선제공격에 적의 하계 및 추계공세가 이어짐으로써 1952년 후반에는 군단 전역에서 전초진지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무렵 수도사단은 6월 16일에 있은 군단의 전투지경선 조정에 따라 군단 중앙의 주저항선과 575고지, 지형능선, 수도고지 등을 전초로 운용하면서 좌전방에 제1연대, 우전방에 제26연대를 배치하고 예비대로 제1기갑연대를 확보하고 있었다. 사단 정면에는 야전 경험이 풍부하고 산악유격전이 능숙한 중공군 제35사단이 572고지-495고지-594고지-747고지-714고지-748고지-472고지선의 동굴화된 진지에 배치되어 피아는 율사리-쌍령동-여호고개-좌수동-북한강을 잇는 횡격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게 되었다. 이 중 적의 일부 전초는 계곡을 넘어 지형능선 하단과 여호고개 남쪽 621고지까지 추진되어 아군의 방어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백쇼트 작전’을 하달 받은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7월 8일 적의 두 전초를 제거하기 위해 제1연대 3대대가 지형능선을, 제26연대 2대대가 621고지를 각각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제2대대는 고지 정상을 장악하였으나 적의 역습으로 물러났고, 지형능선을 향한 제3대대도 능선 하단 3개의 무명고지를 차례로 석권하였으나 적의 집중적인 반격으로 백병전을 펼친 끝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지형능선과 수도고지에 대한 제한공격이 무위로 끝난 후 전선은 8월초까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1952년 8월 5일 적은 사단 주저항선에 일대 공격준비사격을 집중한 후 중대 규모의 병력이 수도고지 북사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제26연대 3대대 11중대가 2차례나 적을 격퇴하였으나, 전초소대의 붕괴로 주진지인 663고지로 철수하자 적은 663고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8월 6일부터 8일까지 수도고지에 대한 쟁탈전이 수 차례 반복되는 가운데, 7월 9일부로 사단장으로 부임한 이용문 준장은 제1연대 2대대를 제26연대에 배속시켜 주진지를 강화하였다. 7월과 8월 한 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된 후 8월 중순에는 다시 교착 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9월 6일 적은 맹렬한 공격준비사격을 가한 후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수도고지 좌우 계곡으로부터 공격을 해왔다. 이 고지를 방어중이던 제26연대 2대대 5중대는 병력의 열세로 고지를 내주었고, 연대의 여섯 차례에 걸친 탈환전은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탈환임무를 부여받은 제1연대는 공군의 근접지원과 군단 포병의 지원하에 목표를 탈환하는데 성공하고 적의 반격을 물리치면서 고지를 사수하였다.
한편 지형능선에서는 기갑연대가 적과 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9월 6일 적은 기갑연대 제5중대의 지형능선과 제6중대가 배치된 575고지에 1개 중대 병력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능선상의 전초소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능선을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후 연대는 탈환을 위해 6차례의 역습을 실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9월 14일 제1연대 2개 중대의 일곱 차례의 역습으로 탈환에 성공한 후 9월 20일까지 진지를 사수하였다.
1952년 9월 6일부터 20일까지 2주간에 걸쳐 계속된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전투에서 이용문 준장이 이끄는 수도사단은 2,40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획득하며 승리로 이끌어 좌수동 계곡을 감제할 수 있는 관측상의 요충을 확보할 수 있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용문 장군은 직접 경험하면서 느낀 교훈적인 요소들을 “수도고지의 전훈”이란 제목으로 기록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치열한 적 포탄에는 종전과 같은 유개호로서는 도저히 유지할 수 없었다. 보통 1야드 이상 두께의 유개가 요구되며 가급적 동굴식 호가 필요하였다. 둘째, 역습공격시에는 역습부대가 적정을 명확히 숙지하여 돌발적인 적정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치열한 적 포격의 포연과 폭연으로 인하여 소총이 작동되지 않아 사격이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포탄 낙하가 상상 외로 치열한 관계로 산병(散兵)의 소총은 파편에 파괴되어 변형되므로 총검은 사전에 착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공방전은 주로 백병전이었으므로 소총의 효력은 전혀 발휘될 수 없었으며 수류탄만이 산병의 유일무이한 무기가 되었다. 공격시에는 15발 이상, 방어시에는 80발 이상 가급적 다수의 수류탄이 요구되었다. 다섯째, 공격 돈좌시 축차적인 부대 투입을 반복하여 동일한 실패를 거듭하였는데 차후 이러한 부대운용은 삼갈 것이며, 일거에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는 새로운 계획과 결심이 요구된다. 여섯째, 주간공격의 실패는 대부분 적의 포화로 공격이 돈좌되고 사기가 저하되어 희생을 많이 내었으며, 숙련된 부대를 제외하고는 돌격 개시 후에 신속히 일거에 적 진지 돌입이 곤란하였기 때문이었다. 일곱째, 포병의 지원사격 없이 은밀히 실시하는 야간공격은 이번 전투에서 성공하였으며, 특히 미명 공격은 아군에 유리함으로 차후 교육에 참고하도록 한다. 여덟째, 치열한 적탄 낙하시의 부대 재편성에 요구되는 축성자료로는 특히 마대를 각 산병에 10매 이상 지참케 하여 최단시간내에 개인호를 축성함이 희생을 적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아홉째, 부대배치는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목표를 점령케 하고 주력을 예비대로서 적 포탄 집중지역 외에 유치케 하고 대비한다. 열째, 전투 손실원 중 다수가 보급운반에서 희생되었는데, 차후 이같이 치열한 전투시에는 보급운반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수도사단장 이용문 준장은 10월에는 전북 남원에 주둔하고 있는 남부지구경비사령부 제2대 사령관으로 전보되어 지리산 등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이듬해인 1953년 6월 24일 전북 남원 운봉 북방 15㎞ 지점에서 항공작전 지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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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