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가 있는 작은 사랑방/인물 얘기 작은 사랑방

시무언 이용도목사

영혼샘 2008. 5. 17. 18:42
감리교 목사이며 전국적인 부흥사였던 이용도(李龍道)의 본관은 안악(安岳)이고, 호는 시무언(是無言)이다.
그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에서 아버지 덕흥(德興)과 어머니 양(梁)마리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변리 교회의 전도부인으로 활약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시무언은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5년 개성의 한영서원에 입학하였다.
그는 3·1 만세운동에 참여해 2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20년 2월에는 기원절(紀元節) 사건에 연루돼 6개월간 복역했다.
출옥한 후 고향인 시변리의 신영(信永)학교에서 얼마간 교사로 봉직했으나 12월에 조선독립주비단사건으로 신계경찰서에 검거됐다.
이듬해 11월 워싱턴 군비감축회의 개최 당일에 동맹휴교와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시무언은 다시 체포돼 6개월간 복역했다.
그의 재능을 아낀 왓슨(A.W. Wasson) 선교사의 추천으로 1924년 2월 시무언은 협성신학교 영문과에 입학했고 이호빈, 이환신 등과 깊이 교유했다.
1925년 11월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고 고민하던 그는 휴양차 이환신의 고향인 평남 강동에 내려갔다가 그곳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시무언은 기도로 밤을 밝히고 새벽에 강단에 섰으며 그가 행한 설교와 기도는 눈물과 감동으로 가득찼다.
그는 심각한 병이 든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외치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감격과 기쁨으로 한 주일을 보냈고, 인근의 다른 교회에서도
부흥회를 인도했다.
신학교에 돌아온 그는 주일학교 교육을 통한 교육계몽운동에 몰두하는 한편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가극 ‘춘풍(1927)’, ‘공주와
꽃팔이(1927)’, ‘십자가를 지는 이들(1927)’을 발표했다.
또 성극 ‘애급의 이스라엘(1928)’, ‘믿음으로 사는 화공(1928)’ 등을 연출했고 때로는 주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무언은 1928년 1월 28일 협성신학교를 14회로 졸업, 다음날로 강원도 통천교회에 파송받아 전도사로 부임했다.
부임 후 1년이 지날 무렵 시무언은 박재봉이라는 청년과 함께 금강산 기슭의 백정봉에 올라가 10일간 불식불음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이후 시무언은 틈만 나면 눈물로 기도하는 ‘열정적인 기도의 사람’으로 변모했으며, 1928년 12월 24일 새벽에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영적 전쟁을 경험했다.
또 1929년 1월 4일 새벽에는 ‘창세기’17장을 읽은 뒤 자신에게서 죄가 떠나감을 느끼고 “주의 손목을 붙잡자 큰 불이 내림”을 체험했으며,
성화(聖火)를 입으로 불어서 죄인들로 이루어진 빨간 군대를 불태워 죽이는 꿈을 꾸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종교체험을 계기로 시무언은 통천 부근 20여개 교회의 부흥집회를 적극 인도했다.
당시 시무언은 눈물로 설교했는데 불과 5분도 못되어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 시작했다고 전할 정도로 영적 능력이 넘치는 부흥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시무언은 장로교와 성결교 등에서도 초빙받아 전국적 부흥회를 4년간 100여회나 인도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눈물어린 기도와 열광적인 설교로써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1930년 새해에 시무언은  “고(苦)는 나의 선생, 빈(貧)은 나의 애처, 비(卑)는 나의 궁전, 예수는 나의 구주, 자연은 나의 친구”라는
생활훈을 세웠다. 나아가 그는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라고 고백하고, “성전은 나의 애인 주님을 조용히 만나는
면회실. 나는 거기서 내 신랑 예수님 품에 내 전신을 맡기노라”고 선언했다.
특히 그는 1930년 2월 평양중앙감리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피의 설교’라는 제목으로 7시간 동안이나 설교해 많은 사람을
감명시켰다.
이 집회에 참석했던 청년  7인이 서문밖 교회 지하실에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고 후일 ‘평양기도단’으로 지칭되었다.
한편 시무언은 1930년 9월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10월에는 전국주일학교 연합회 간사로 발령받고 상경하여 활동했다.
또 그는 1931년 5월 경성지방 순회목사로 특별파송을 받아 신앙부흥운동에 헌신했다. 당시 그는 “진리와 함께 즐거워하는 하늘의 사랑”을
강조했으며, “주님은 나에게 끌리시고 나는 주님에게 끌리어 하나를 이루어 결국 나는 주의 사랑 안에 있고 주는 나의 신앙 안에 있게 되는
합일”의 경지를 체험했다고 밝혔다.   
한편 1931년 7월부터 시무언은 이호빈과 함께 원산을 방문하여 ‘원산의 수도자들’로 알려진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 등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그 후 9월에 그가 삼방약수터에서 요양하던 중 다시 이들의 방문을 받고 집회를 가졌으며 예수의 고난과 신비적 사랑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1932년 시무언은 서울, 인천, 강원도, 평양, 평남, 충남, 황해도 등 전국 곳곳에 성령의 불길을 지펴나갔다.
이러한 그의 부흥운동은 이전의 성서 사경회 중심을 벗어나 성령중심의 체험적 신앙으로 변모시켰다. 따라서 그가 가는 곳마다 영적
감격과 회개의 눈물 기도가 넘쳐났고, 그들이 받은 은혜의 체험들을 함께 나누는 기도 모임이 생겨났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전한 서구신학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기존의 목사들과는 달리 그는 조선식 도포차림으로 우리네 정서에
맞는 언어로 회개와 신앙을 부르짖었으며 성령 체험을 강조하는 ‘민족적 신비주의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예수를 유일 최대의 애인으로
삼고, 언제든지 그만을 사랑하다가 그를 위해 이 생명을 바치고 싶어요”라고 노래한 시무언의 부흥운동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31년 10월 장로교 황해노회에서는 시무언의 여신도와의 잦은 서신 거래, 소등(消燈) 기도, 교역자 공격, 무교회주의자 라는 등의 문제를 제기해 그에게 금족령을 내렸다.
또 1932년 4월에는 평양노회가 ‘평양기도단’에 활동 제한조치를 가해 규제했다.
이때부터 시무언의 부흥운동이 교권적 질서와 신앙전통을 파괴하는 것이며 특히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이라는 이유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괴하는 분자들’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감리교 중부연회는 1933년 3월 그에게 휴직처분을 결정했다.  시무언을 이단으로 낙인찍은 교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자생적인
기도모임에 참가한 교인들마저 출교했다. 쫓겨난 무리들은 계속 기도하면서 새 교단 설립을 강력히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33년 6월 3일 평양에서 이호빈, 백남주, 한준명, 박계주 등 90여명의 교인이 모인 가운데 ‘예수교회’가 창립 선언할 때
시무언은 발기인 대표였으며, 6일에 열린 창립공의회 때는 초대 선도감(宣道監)으로 선출되어 공식적으로 예수교회의 창설자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무언은 지병인 폐결핵으로 고생하다가 10월 2일 원산 광석동에서 가족과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33세의
젊은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시무언은 학창시절 나라와 민족을 위환 독립운동에 투신해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애국청년이었다.
또한 그는 가야금을 사랑한 예술가이자 가극, 연극, 시, 편지, 일기를 남긴 문필가였다.
무엇보다도 시무언은 1930년대 정체성과 역동성을 잃고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한국교회에 열정적인 성령부흥운동으로 활력을
불어넣었고 회개와 기도와 사랑을 선포한 ‘광야의 소리’였으며, 오직 예수만을 위해 미친 듯이 살았던 ‘신앙의 활화산’이자  ‘거룩한 열정의
사람’이었다.
나아가 그는 무(無), 공(空), 자연, 그리움, 한, 느낌 등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영성을 강조하여 토착적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으며
초교파적 활동에 헌신한 선지자였다.
특히 시무언은 성령에 의한 거듭남과 주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신비적’ 신앙을 강조해 한국교회에 ‘혁명의 수술’과 ‘부흥의 치료’를
감행한 목회자였으며 민족의 영적 구원을 외쳤던 ‘한국의 예레미야’였다.